무형문화재 옻칠 공방, 지역별 전통의 맥을 잇는 장인들의 공간
한국의 전통 공예 중에서도 옻칠은 오랜 세월을 거쳐 정제된 기술로,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실용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발전시켜 왔습니다.
옻칠은 단순한 도료가 아니라 자연에서 온 생명력을 지닌 재료로, 나무에 생명을 더하고 세월을 견디는 힘을 부여하는 기술입니다. 이 고유한 전통을 잇기 위해 현재 전국 각지에서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장인들이 공방을 운영하며 옻칠의 맥을 잇고 있습니다. 이들은 단순한 기능 보존이 아니라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옻칠에 담아내며 세계적인 예술성으로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옻칠은 보기에는 단순하지만 옻나무 수액을 채취해 정제하고, 반복된 칠과 건조, 연마 과정을 거쳐야만 완성되는 고도의 수공예 기술입니다. 이 전통을 지키기 위한 각 지역의 무형문화재 옻칠 공방은 단순한 작업장이 아닌 수백 년 전통의 산실이며, 미래 세대에게 이어져야 할 살아 있는 문화유산입니다.
전라남도 나주 – 정윤식 선생의 칠예공방
전라남도 나주는 삼국시대부터 목재와 옻나무 자원이 풍부했던 지역으로 옻칠 공예의 중심지로 평가 받아 왔습니다. 이곳에서 활동 중인 무형문화재 제18호 옻칠장 정윤식 선생은 오랜 세월 동안 전통 옻칠 기법을 보존하고 있는 장인입니다. 칠예공방은 단순히 옻칠 제품을 제작하는 곳이 아니라 후학을 양성하고 전통 기법을 기록으로 남기는 데 집중하고 있는 공간입니다. 특히 정 선생은 생칠과 흑칠을 구분하여 사용하며 천연 안료를 사용한 색칠 기법에 있어 국내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습니다.
칠예공방은 나주 산림 자원을 이용한 국내산 천연 옻만을 사용하며 이 과정에서 삼칠이라 불리는 세 번의 필수 정제 작업을 거칩니다. 이 기술은 습도, 온도, 날씨에 따라 작업 환경을 정밀하게 조절이 필요해서 숙련된 경험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공방 내에는 30년 이상 된 칠기 목재 원판들이 보관되어 있으며 이는 긴 시간에 걸쳐 변형이 적은 나무를 골라 선별한 결과물입니다. 이런 노력을 통해 만들어진 나주 칠기는 해외 박람회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경상북도 안동 – 김상호 장인의 안동칠연
경상북도 안동은 전통 유교문화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으나 동시에 섬세한 칠기 공예의 본고장이기도 합니다. 안동에서 무형문화재로 활동 중인 김상호 장인은 안동칠연이라는 전통 옻칠 공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김 장인은 나전칠기 기법과 순수 옻칠 기법을 동시에 구사하는 독특한 기술로 유명합니다. 그의 작품은 실용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갖춘 공예품으로 안동 하회마을 인근 공방에서 실제 체험도 가능합니다.
안동칠연의 특징은 말총 칠기입니다. 말총이라는 특수한 재료를 옻칠과 결합해 내구성을 높이고 독특한 질감을 만들어냅니다. 이는 일반 옻칠 제품에서는 볼 수 없는 안동 고유의 기법입니다. 김 장인은 매년 2~3명의 제자를 직접 선발하여 기술을 전수하며 옻칠의 현대적 적용 가능성에 대해 끊임 없이 탐구 중입니다. 그의 공방은 단순한 전시용 공간이 아니라 실제로 사용 가능한 생활 옻칠 용기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어 옻칠이 일상과 얼마나 가까운 예술인지 알려주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전라북도 순창 – 박용기 장인의 칠원당
전라북도 순창은 고추장으로 유명하지만 동시에 전통 칠기 산업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박용기 장인이 운영하는 칠원당은 조선시대 왕실에 납품되었던 칠기 제작 기술을 계승한 공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박 장인은 무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통 옻칠 기법을 정교하게 복원하고 있습니다.
칠원당의 큰 특징은 삼베 옻칠 기법입니다. 나무 위에 삼베를 입히고 그 위에 옻칠을 여러 번 덧칠하여, 매우 단단하면서도 가벼운 칠기를 만듭니다. 이는 고대 궁중에서 주로 사용되던 방식으로 현재는 거의 전승자가 드문 희귀 기법입니다. 공방 내에는 50년 이상 된 작업 도구들이 보존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과거의 칠기 제작 환경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칠원당은 최근 지역 예술고등학교와 협약을 맺고 옻칠 교육을 정규 교육과정에 도입하는 등, 전통 기술을 현대 교육 체계에 통합하려는 시도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박 장인의 노력은 단순한 기술 보존이 아니라 옻칠의 예술적 가치를 사회 전체로 확장시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강원도 원주 – 조정래 선생의 칠예원
강원도 원주는 비교적 최근 들어 옻칠 산업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지역이지만 조정래 선생이 운영하는 칠예원은 무형문화재 등록 이전부터 전통 옻칠을 연구해온 공방입니다. 조 선생은 나전칠기 대신 투명 옻칠’위주의 제작 방식을 채택하고 있어, 현대적인 감각과 전통 기술의 접목이 돋보이는 스타일을 보여줍니다.
칠예원의 주요 작품은 자연목을 그대로 살리는 방식입니다. 원목의 결을 해치지 않고 옻칠을 얇게 여러 번 입혀서, 자연스러운 광택과 깊은 색감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는 최근 젊은 소비자층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으며 옻칠 제품이 고가 수집품이 아니라 일상에 스며들 수 있다는 인식을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조 선생은 대학과 협업해 옻칠을 소재로 한 가구 디자인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어, 산업화와 전통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충청남도 공주 – 정희석 장인의 공주칠방
공주는 백제문화권 중심지로 전통 공예에 대한 유산이 깊은 도시입니다. 정희석 장인이 운영하는 공주칠방은 백제 옻칠 문화의 복원을 목표로 운영되는 공방으로 고고학적 자료에 기반한 칠기 복원 작업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정 장인은 무형문화재는 아니지만, 유물 기반의 연구와 칠기 복원 기술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갖고 있습니다.
공주칠방의 주요 작업 중 하나는 백제칠복원 프로젝트입니다. 이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칠기 유물을 바탕으로 복원도를 작성하고, 전통 방식 그대로 제작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실제 공방 내에는 발굴된 유물 사진과 비교해가며 작업할 수 있는 복원 시설이 갖춰져 있습니다. 공주칠방은 지역 대학 및 박물관과 협력하여 유물 복원에 필요한 고급 기술을 외부로 공유하는 시스템도 갖추고 있습니다.
마무리 – 지역별 옻칠 공방은 단순한 전통이 아닌 살아 있는 유산이다
옻칠은 단순한 기능을 넘어 세대를 잇는 문화적 자산입니다.
전국 각지의 무형문화재 옻칠 공방은 지역의 고유성을 담은 예술과 기능을 함께 담아내고 있으며, 그 기술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있으나 근본적인 정신은 변하지 않습니다.
장인들의 손끝에서 이어지는 이 기술은 단순히 과거를 보존하는 것이 아닌, 현재와 미래를 위한 문화적 연결 고리이며, 옻칠 공예가 세계 무대에서 더 널리 알려지기 위해 반드시 보존되고 전승되어야 할 소중한 자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