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문화재

바다와 함께 살아온 공동체: 국가무형문화재 해녀의 세시풍속과 공동체 의식

happy-lolo 2025. 8. 10. 08:00

매서운 겨울 바람이 불어올 때도 뜨거운 여름 햇살이 내리쬘 때도 제주의 해녀는 오늘도 어김없이 바다를 향해 나아갑니다.

바다는 해녀에게 생계의 터전이지만 동시에 전통과 문화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해녀는 단순한 직업인이 아닙니다. 이들은 공동체를 이루고 규범을 세우며 수백 년에 걸쳐 전해 내려온 세시풍속을 실천해왔습니다. 그들의 삶은 해산물 채취라는 생업을 넘어 연중 특정 시기마다 진행되는 의례와 공동체 행사를 통해 바다와의 조화를 유지하고 세대 간 전통을 계승하는 중요한 통로로 이어져 왔습니다.
이 글에서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제주 해녀 문화의 핵심인 세시풍속과 공동체 의식에 대해 심층적으로 조명해봅니다. 해녀들이 바다를 단순한 생존의 공간이 아닌 삶의 윤리를 실천하는 장으로 만들었던 방식과 이를 둘러싼 다양한 문화적 실천을 살펴보겠습니다.

 

바다와 함께 살아온 해녀

 

 

해녀 공동체의 구조와 의식 문화

해녀는 개별적으로 바다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매우 조직적이고 규율 있는 공동체 안에서 활동합니다. 제주의 각 마을에는 해녀회 또는 해녀조직이 존재하며 이는 해녀들의 직능 조합이자 공동체 윤리를 유지하는 중심 기구입니다.

 

해녀회의 역할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장 사용 구역을 정하고 관리하는 기능

공동 수익 분배 및 채취 일정 조율

새로 입문한 해녀에 대한 교육과 평가

세시행사, 제사, 마을 축제의 주관

 

해녀회는 일반적인 직업조합 이상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마을마다 해녀회의 권한은 절대적이며 해녀의 활동 영역, 채취물 종류, 기간 등을 스스로 자율적으로 정합니다. 이러한 자율적 통제는 외부의 규제가 없이도 수백 년간 지속 가능한 어업문화를 만들어낸 중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해녀의 세시풍속: 자연과 인간이 함께하는 시간의 흐름

 

세시풍속은 해녀 공동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세시(歲時)란 한 해의 흐름 속에서 계절과 절기에 따라 행해지는 의례나 관습을 말하며 해녀에게 이 풍속은 자연을 이해하고 순응하는 방법이자 공동체 결속을 다지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정월 초하루: 바다 금지와 무사안녕 기원

제주의 해녀들은 음력 정월 초하루가 되면 바다에 나가지 않습니다. 이날은 한 해의 시작을 상징하는 날로, 바다의 신에게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모든 물질을 중단합니다. 각 마을의 해녀회에서는 바닷가 근처에 마련된 당(堂)이나 해녀당에서 제사를 올리고 해신에게 정성을 다합니다.

이 제사는 해신제 혹은 용왕제라고도 불리며 마을에 따라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쌀, 술, 돼지고기 등을 제물로 올리고 모든 해녀가 정갈한 복장을 갖춰 참여합니다. 이때는 일종의 금어기이자 공동체 정화의 시간이 됩니다.

 

음력 2월 초하루: 해녀 풍어제

이 날 역시 중요한 절기입니다. 해녀들은 이 시기를 통해 본격적인 물질 시즌의 시작을 알립니다. 풍어제는 바다의 신에게 안전과 풍요를 다시 한 번 기원하는 절차이며 이때부터 해녀들의 활동이 본격화됩니다.

풍어제를 통해 마을 사람들은 해녀들의 활동을 인정하고 격려하며 해녀는 이 시점을 기준으로 일 년간의 물질 계획을 세웁니다. 어떤 마을에서는 이 날 첫 물질이 이루어지며 상군 해녀가 앞장서서 수확을 시작합니다.

 

음력 6월: 바당굿(바다굿)

바당굿은 제주 해녀 문화에서 가장 규모가 큰 행사 중 하나입니다. 음력 6월 무렵 해녀들은 마을 어귀나 해안가에서 굿을 벌이며 바다에 대한 감사와 함께 악귀를 물리치는 의식을 진행합니다. 이때 무당이 초청되어 해신과 교감을 시도하며 해녀들은 손에 쌀이나 떡, 생선을 들고 절을 올립니다.

이 의식은 단순한 종교적 행위를 넘어서 해녀 공동체의 신뢰와 단합을 상징하는 중요한 문화행사로 자리 잡았습니다. 한 해 동안 바다에서 있었던 죽음, 사고, 풍랑 등을 정리하고, 공동체 내에서 겪은 갈등이나 오해를 풀기도 합니다.

 

음력 10월: 추수제와 가을 제사

추수철이 다가오면 해녀들은 다시 한 번 바다에 대한 감사를 표현합니다. 음력 10월에는 물질이 가장 왕성한 시기이면서 동시에 수확을 마무리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이 시점에서 해녀들은 마을 전체와 함께 가을맞이 제사를 지냅니다. 이때는 해산물 외에도 육지 농산물, 곡식 등 다양한 재료가 제물로 사용됩니다.

 

해녀 공동체의 의사결정 방식

 

해녀는 공동체 내부에서 모든 의사결정을 다수결이나 장로 중심으로 이끌어갑니다.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상군 해녀가 리더 역할을 맡으며 중요한 결정은 상군 해녀들의 회의를 통해 이뤄집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사항들은 공동 회의에서 반드시 결정됩니다.

 

바다에 들어갈 날짜와 시간

채취 금지 대상의 선정

해녀회비 납부와 운영 방식

신규 해녀의 승인 여부

 

이러한 의사결정은 마을마다 다소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공동체 전체의 합의를 중시하며 위계 질서를 존중하는 분위기 속에서 진행됩니다. 이 과정은 민주주의적 운영방식과 전통적 계급체계가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사회구조를 보여줍니다.

 

해녀 공동체의 윤리 의식과 사회 규범

해녀는 공동체 내부에서 엄격한 윤리의식과 상호 존중의 문화를 공유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어장 질서입니다. 마을에서 정한 어장 구역 외에는 절대 침범하지 않으며 해녀 간의 갈등을 방지하기 위해 사전에 모든 규칙을 정하고 따릅니다.

 

해녀들이 지키는 주요 윤리 규범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린 해산물이나 산란기 어종은 채취하지 않는다.

서로의 테왁 위치를 넘어가거나 앞지르지 않는다.

수확한 해산물을 공동 창고에 보관하거나 균등하게 분배한다.

신입 해녀에게는 채취 권리를 제한하고, 선배 해녀의 지도 아래 배운다.

해녀 간 불화는 공식 회의를 통해 조정하며, 무단 활동 시 징계가 가능하다.

 

이러한 규범은 법적으로 규제되지 않지만 공동체 내부에서는 매우 강력한 사회적 통제로 작용합니다. 해녀는 윤리 규범을 어긴 해녀를 단체에서 제명하거나 물질 참여를 제한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해녀 문화의 현대적 계승: 공동체 정신의 확장

 

현대사회에서 해녀 공동체는 점점 쇠퇴하고 있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그 정신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해녀박물관, 해녀학교, 해녀축제 등이 있으며 해녀회 내부에서도 젊은 세대의 유입을 위한 유연한 제도 도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해녀축제는 해녀 공동체가 외부와 소통하는 대표적인 문화 행사로 자리 잡았으며 관광객과 주민, 연구자들이 함께 해녀 문화를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마무리: 바다와 함께 살아온 공동체, 그리고 이어가야 할 유산

 

해녀의 세시풍속과 공동체 의식은 단지 한 지역의 전통 문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지켜온 자연과 인간의 공존 방식이며 여성 주체의 공동체 운영 모델이며 지속 가능한 어업의 표본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거친 파도 속에서도 질서를 지키고 생명을 담보로 한 공동체 윤리를 실천해 왔습니다. 바다가 인간의 탐욕 앞에 파괴되고 있는 지금, 해녀의 삶과 의식은 더욱 중요한 가치를 갖습니다.
우리는 이제 해녀 문화를 단순한 관람의 대상이 아닌 미래를 위한 전통의 자산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그들의 세시풍속은 시간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 문화유산이며 공동체 의식은 앞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지속가능한 사회 모델의 근간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