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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일기장 속 계절의 기억
    문방구와 추억의 물건 2025. 10. 18. 09:30

    지금은 대형 문구점과 온라인 쇼핑몰이 대신하고 있지만, 한때 문방구는 아이들의 모든 세상이었습니다.
    학교 앞 골목, 문방구 앞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면 형형색색의 연필, 스케치북, 스티커, 지우개가 마치 보물처럼 반짝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마음을 끌던 것은 바로 그림일기장이었습니다. 하얀 종이 위에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 글씨 아래 묻어 있던 색연필 자국, 그리고 담임선생님의 빨간 동그라미 등 그건 단순한 숙제가 아니라 우리의 하루이자 소통의 첫 번째 기록이었습니다.

     

    그림 일기장의 기억

     

     

    봄 – 새 학기와 함께 시작된 첫 그림일기

    봄이면 새 노트와 새 연필을 사러 문방구에 갔습니다. 개나리나 벚꽃이 그려진 표지를 고르며, 마음속에서는 새 학기의 설렘이 피어났습니다. 첫 그림일기에는 대개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습니다.

    오늘은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놀았다. 하늘이 맑고 바람이 시원했다.

    그림에는 빨간 운동복을 입은 아이들과, 구석에 작게 그려진 해님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림일기장은 단순히 글쓰기 연습장이 아니라 친구와 선생님 사이의 마음을 잇는 다리였습니다.
    선생님은 그 짧은 문장 안에서도 아이의 감정을 읽었고, 때로는 다음엔 어떤 꽃을 그릴까? 라는 코멘트로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여름 – 땀과 웃음으로 번진 페이지

    여름방학이 되면 그림일기장은 일기장이자 방학의 동반자였습니다. 아침마다 잠들기 전까지 오늘 하루를 남기기 위해 연필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친구들과 물총싸움을 했다. 물이 시원했다.

    아이스크림을 먹다 녹아서 손이 끈적끈적 했다.

    그림 속의 태양은 언제나 너무 크게 웃고 있었고, 파란색 크레파스는 거의 다 닳아 있었습니다.

    그림일기장을 다 채운 아이는 마치 자신의 인생 한 권을 완성한 작가처럼 뿌듯해했습니다. 그 속엔 냄새까지 담긴 추억이 있었습니다. 땀, 풀잎, 종이 냄새 그리고 문방구 앞 자그마한 선풍기 바람 아래에서 친구들은 서로의 그림일기를 펼쳐보며 너 그림 진짜 잘 그렸다며 웃곤 했습니다. 그건 경쟁이 아니라 순수한 칭찬과 소통의 시간이었습니다.

     

     

    가을 - 단풍의 계절

    가을이 오면 그림일기장은 색이 더 풍성해졌습니다. 노란 낙엽, 주황빛 운동회, 그리고 단풍으로 물든 운동장이 있습니다.
    그림일기장은 계절의 색감을 그대로 품은 작은 화폭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운동회를 했다. 내가 달리기에서 1등을 했다.

    짧은 문장에도 성취감이 묻어나고, 그림 속에는 자신이 달리는 모습이 늘 맨 앞에 있었습니다.

    문방구에서는 그 계절에 맞는 새로운 스티커와 색연필이 등장했습니다.
    금박 스티커, 반짝이펜 같은 아이템은 그림일기를 장식하는 작은 사치이자 즐거움이었습니다.

    가을의 그림일기장은 성장과 변화의 기록장이었습니다. 단순한 숙제를 넘어 스스로의 감정을 정리하고 표현하는 창이었습니다.

     

     

    겨울 – 조용한 교실과 흰 종이 위의 온기

    겨울의 교실은 차갑지만, 아이들의 그림일기장은 언제나 따뜻했습니다.

    오늘은 눈이 와서 친구들과 눈싸움을 했다.

    엄마가 만든 호빵을 먹었다. 너무 따뜻했다.

    글씨는 조금 더 또박또박해졌고, 그림에는 손장갑과 털모자가 등장했습니다. 이 시기의 그림일기장은 계절의 끝을 담는 작은 앨범이자 한 해 동안 자신이 얼마나 자랐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었습니다.

    문방구에서는 새해 준비물로 새 그림일기장이 진열되었습니다. 그 표지에는 종종 새로운 시작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그걸 고르며 다음 계절의 자신을 상상했습니다.

     

     

    그림일기, 단절된 시대의 소통의 기억

    오늘날 아이들은 디지털 기기로 일기를 씁니다. 사진이 대신 기억을 남기고, SNS가 감정을 대신 표현합니다. 하지만 그 시절의 그림일기장은 소통의 연습장이었습니다. 단어를 고르고, 색을 선택하며,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달하는 훈련이었습니다. 그림 일기장을 통해 아이들은 표현의 즐거움을 배웠고, 선생님은 관심의 언어를 배웠습니다. 그건 단순한 교육 자료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 교류의 매개체였습니다.

     

     

    잊혀진 문방구, 그리고 여전히 살아있는 기억

    문방구는 사라졌지만, 그 안의 정서와 문화는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습니다.

    지금의 아이들은 태블릿으로 그림을 그리지만 그림일기장의 본질 마음을 기록하는 행위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다시 그런 느린 기록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빠른 세상 속에서 손끝으로 색칠하던 그 따뜻한 시간이 있는
    한 장의 그림일기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만납니다.

     

     

    마무리 – 종이 위의 시간, 마음의 기록

    그림일기장은 단순한 종이와 잉크의 조합이 아닙니다. 그건 한 세대의 감정과 문화가 깃든 소통의 도구였습니다.

    계절마다 다른 색으로 물든 그 페이지들은 지금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의 손끝에서 다시 그려질지도 모릅니다. 그때 그 시절의 크레파스 냄새와 함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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