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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지로 복원된 고려대장경 – 전통 종이가 지켜낸 문화유산
    국가문화재 2025. 7. 2. 16:32

    시간은 문명을 삼키고 기록은 세월 속에 바랩니다. 그러나 어떤 기록은 천 년의 세월을 견디고도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세계 최대의 목판 인쇄물 팔만대장경(고려대장경)이 바로 그렇습니다. 13세기에 만들어진 이 불교 대장경은 단지 종교적 경전이 아니라 고려의 정신, 기술, 그리고 기록문화를 보여주는 세계적 유산입니다.

    이 대장경이 지금까지 온전히 전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놀라운 재료가 숨어 있습니다. 바로 한지입니다. 전통 한지는 그 자체가 기록의 그릇이자, 기록을 보호하는 방패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고려대장경의 복원과 보존 과정에서 한지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그리고 한지가 지닌 문화재 보존의 힘에 대해 조명합니다. 단순한 종이를 넘어선 한지의 진짜 가치가 천 년을 건너 오늘날 우리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고려대장경 (팔만대장경)

     

     

    고려대장경이란 무엇인가?

    고려대장경은 고려 고종 23년(1236년)에 몽골의 침입으로부터 불법(佛法)을 지켜내기 위해 제작되기 시작한 불교 경전 판각물입니다. 전체 8만 1,258매, 1,514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인해 팔만대장경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이 목판들은 현재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 보관되어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등재되어 있습니다.
    판각의 정교함, 목재의 선택, 배열 방식, 그리고 보존 환경까지 모든 면에서 고려인들의 탁월한 기록 기술이 반영된 유산입니다.

    하지만 이 목판을 인쇄하여 읽고, 보관하고, 해석하려면 반드시 종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종이는 수백 년의 세월에도 찢어지지 않고 글씨가 사라지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요구를 충족할 수 있는 유일한 종이가 바로 전통 한지였습니다.

     

     

    왜 고려대장경 복원에 한지가 사용되었을까?

    20세기 중후반 고려대장경의 내용 복원과 디지털화, 해석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고려대장경의 내용을 재인쇄하거나 복사할 수 있는 종이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산업용 종이(펄프지)가 고려되었지만 몇 가지 문제점이 발견됐습니다.

    펄프지의 경우, 수명이 짧고 시간이 지나면 바스러지거나 황변되고 잉크 번짐이 심하여 글씨가 뭉개집니다. 얇고 질긴 느낌이 없어 접거나 펼칠 때 손상 위험이 큽니다.

    이에 따라 문화재청과 국립중앙도서관, 전통 기록보존연구소 등에서 한지를 중심으로 한 복원용 종이 실험을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진 안동한지 전주한지가 고려대장경 복원에 최적의 조건을 가진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한지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수명: 1,000년 이상 보존 가능 (실제 고려, 조선 고문서가 이를 입증)

    섬유 구조: 닥나무 섬유로 인한 높은 인장강도와 내습성

    산성 없음: 산성화가 거의 없고 중성 또는 약알칼리성으로 글씨 변색 없음

    잉크 흡수력: 먹이나 인쇄잉크가 퍼지지 않고 안착함

    이로 인해 고려대장경 복원본과 해제집, 주해판, 디지털 스캔본 모두 한지 인쇄본을 기본 자료로 삼게 되었습니다.

     

     

    전통 한지의 제작과 고려대장경의 궁합

    한지는 닥나무의 속껍질(백피)을 삶고, 두드리고, 푼 뒤, 물 위에서 뜨는 발지 기법으로 만들어집니다.
    이 과정은 계절, 수온, 점액의 농도, 바람의 세기까지 모두 고려되어야 하며, 숙련된 한지장(韓紙匠)이 아니면 동일한 품질의 종이를 반복 생산할 수 없습니다.

    고려대장경 복원용 한지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표면이 부드러우나 너무 미끄럽지 않아야 함

    양면 모두 먹 번짐이 없어야 함

    접었다 펴도 섬유가 틀어지지 않아야 함

    벌레나 곰팡이에 강해야 함 (이를 위해 황촉규 풀 성분을 함유함)

     

    실제로 사용된 전통 한지는 국가무형문화재 한지’의 손에서 만들어졌습니다.
    특히 경북 안동의 한지장이 만든 종이는 고려대장경의 정밀 복본(精密複本) 제작에 쓰였으며, 이는 현재 박물관, 도서관, 국회도서관 등의 보존용 고문서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한지가 지켜낸 문화유산 – 그 이상의 역할

    고려대장경의 복원과 인쇄에 사용된 한지는 단지 복제 수단이 아닙니다.
    그 자체가 기록의 지속성을 만들어주는 문화재 보호 장치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고려대장경 외에도 많은 고서 및 문화재 복원에 전통 한지가 활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훈민정음해례본 복제본 제작

    조선왕조실록의 정본 복사

    조선 후기 목판본 고서 인쇄와 표지 복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문서의 보존 처리

     

    이 모든 작업에서 가장 신뢰받는 재료가 전통 한지였습니다.

     

     

    디지털 시대, 한지가 다시 주목받는 이유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한지의 가치가 다시 부각되고 있습니다. 디지털 자료는 시간이 지나면 포맷이 바뀌고 저장 장치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반면, 한지에 기록된 정보는 전기가 꺼져도, 시스템이 망가져도 남아 있습니다. 또한 한지는 디지털 보존물의 원본 자료로 사용됩니다. 디지털화 작업 전에 한지에 인쇄된 경전이나 문서를 스캔하고 이를 통해 텍스트 추출, 이미지 분석, 판본 비교 등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결국 아날로그 최강의 기록 재료로서 한지는 디지털 시대의 또 다른 축이 되고 있습니다.

     

     

    마무리 – 기록의 그릇이자 문화의 증인, 한지

    고려대장경은 단지 오래된 불경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고려의 정신, 당대 장인의 기술, 백성들의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유산을 오늘날까지 지켜낸 것은 놀랍게도 한 장의 종이였습니다.

    전통 한지는 단순한 재료가 아닙니다.
    그것은 문화를 담는 그릇이며, 시간을 견디는 방패이고, 한 민족의 기억을 이어주는 살아있는 매개체입니다.

    고려대장경은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아래에는 오늘도 한지를 짓는 장인의 손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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