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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형문화재 배첩장의 예술성과 조선시대 문서 보존 방식의 비밀
    국가문화재 2025. 7. 11. 08:30

    현대 사회에서는 디지털 문서가 일상이 되었지만 과거에는 종이 한 장에 담긴 글이 생명을 좌우하고 역사를 보존하는 핵심 역할을 했습니다.

    이처럼 문서를 소중하게 다루던 시대, 단순히 기록만이 아닌 보존이라는 가치를 예술로 승화시킨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 있는 장인이 바로 배첩장(褙貼匠)입니다.

    배첩장은 단순한 종이 기술자가 아닙니다.  문서, 그림, 서화, 고문헌을 보호하고 되살리는 전통문화 보존의 장인이며 한국의 기록문화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이 글에서는 배첩장의 역할과 예술성, 조선시대 문서 보존의 정밀한 방식, 그리고 오늘날 이 전통 기술이 어떤 위기에 처해 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배첩장 문서 복원

     

     

    배첩장이란 누구일까요?

    배첩(褙貼)이란 말은 배접이라고도 하며, 전통적으로 그림이나 글씨, 문서를 여러 겹의 종이로 덧대어 보존하거나 꾸미는 기술을 의미합니다. 이 작업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장인이 바로 배첩장입니다.

    배첩장의 주요 업무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서화 보존 및 복원: 오래된 그림이나 문서가 찢어지거나 색이 바랜 경우 이를 손상 없이 다시 살려냅니다.
    족자, 병풍, 책판 제작: 서예나 그림을 병풍이나 족자로 재가공하는 작업.
    문서의 뒤면 보강: 종이 한 장짜리 문서에 여러 겹의 한지를 덧대어 내구성을 높이는 방식.


    배첩장의 기술은 단순한 접착이나 수선이 아닙니다.

    종이의 섬유, 수분 함량, 산성도, 붓 터치의 방향까지 고려해야 하며, 심지어 작품의 감성까지 살리는 복원 예술로 평가받습니다.

     


    조선시대의 문서 보존 철학

    조선시대는 유교 중심 사회로 문서와 기록의 가치를 매우 중시했습니다. 나라의 정책부터 백성의 호적, 토지 문서, 과거시험 답안지, 국왕의 교서 등은 모두 소중히 다루어졌으며 이를 오래도록 보관할 수 있는 기술과 장인들이 필요했습니다.


    기록 보존의 제도화

    조선은 사고(史庫)를 설치해 국가 차원의 문서 보존을 체계적으로 관리했습니다. 대표적인 사고는 전주, 태백, 충주, 성주의 사고 4대본입니다. 이들 사고에서는 대경, 실록, 교지 등의 문서를 수백 년 이상 유지할 수 있는 보존 환경을 유지했으며 그 기반이 된 것이 바로 배첩장의 기술이었습니다.


    자연소재 중심의 보존

    당시 배접에 사용된 재료는 모두 자연 소재였습니다. 한지, 쌀풀, 칠(漆), 닥나무 섬유, 매화기름 등.
    이 자연 친화적 보존 방식은 현대의 화학적 복원보다 훨씬 내구성이 뛰어나고 인체에 무해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도감(圖監)과 장인 체계

    조선에는 도감이라는 공예 인력 시스템이 존재했고, 배첩장은 여기서 왕실 문서나 그림 복원에 참여했다. 왕의 어명이나 국보급 서화를 다룰 수 있는 소수의 장인만이 배첩 업무에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기술은 매우 정밀하고 고차원적인 예술로 발전할 수 있었다.



    배첩장의 예술성과 독창성

    배첩장의 기술은 단순히 고치고 붙이는 수준을 넘어섭니다. 그 안에는 수십 년의 숙련된 감각과 심미안,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가 녹아 있습니다.


    종이와 호흡하는 기술

    배첩 작업은 종이의 성질에 따라 달라집니다. 같은 한지라도 제작 시기, 지역, 제조 방식에 따라 흡수율과 강도가 다르기 때문에 장인은 손끝으로 종이의 숨결을 느끼며 작업을 합니다.


    붓 터치의 방향을 살리는 배접

    서예나 문서의 경우, 붓 터치의 방향을 거슬러 붙이면 종이가 갈라지거나 잉크가 번질 수 있습니다. 배첩장은 이를 고려하여 원작의 붓 결을 해치지 않는 방향으로 배접을 진행합니다.


    색과 여백의 조화

    족자나 병풍으로 만들 때는 단지 붙이는 것을 넘어 색감과 여백의 미학까지 고려해야 합니다. 작품이 가장 돋보이도록 배경색을 선택하고 여백의 균형을 맞추는 데서 배첩장의 미적 감각이 발휘됩니다.

     


    현대 사회에서 배첩장이 직면한 문제들

    안타깝게도 배첩장의 기술은 현재 심각한 전승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 해보겠습니다.


    젊은 세대의 관심 부족

    디지털 시대에는 종이 기반 문서나 서화를 다룰 기회가 적어 배첩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매우 드뭅니다. 현재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배첩장 기능보유자조차 전수자를 찾기 힘든 상황입니다.


    경제적 보상 부족

    배첩 작업은 고도의 기술과 시간이 요구되지만 대중적으로 소비되지 않기 때문에 시장성이 매우 낮습니다. 작품 1점 복원에 수일에서 수개월이 소요되지만, 작업비는 이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문화재 보호와 보존 기준의 충돌

    현대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복원 기준은 화학적 안정성과 국제 표준을 요구하지만, 배첩장은 전통 한지와 천연 재료 중심의 방식을 고수합니다.
    이에 따라 전통 방식이 소외되거나, 보조 수단으로만 취급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배첩 기술의 미래: 되살릴 수 있을까요?

    배첩장의 기술은 단지 과거를 되살리는 복원 기술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디지털에 밀려 잊고 있는 기록의 가치와 보존의 철학'을 되살리는 행위입니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통문화 교육과의 연계

    배첩장 기술을 청소년 대상 전통문화 체험 행사로 운영하면 흥미 유도와 함께 인식 개선이 가능합니다. 특히 한지 만들기 + 족자 배접 체험은 교육 효과가 큽니다.


    디지털 기록과 연계한 융합 콘텐츠

    전통 복원 과정을 촬영해 유튜브 다큐 시리즈, SNS 숏폼 영상, VR로 복원 과정 체험하기 등으로 확장하면 젊은 세대와의 접점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국제적 보존 협력

    유네스코와의 협력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의 배첩 기술을 세계 유산 보존 기법의 모델로 확장할 수 있습니다. 전통 종이 복원 기술은 유럽, 동남아에서도 주목받는 분야이므로 기술 교류의 기회도 충분합니다.

     


    마무리: 기록을 지키는 장인의 손끝에서 미래가 태어난다

    배첩장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 조용히 사라지고 있지만 그 기술과 철학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가 보는 수백 년 된 서화, 실록, 왕의 교지가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이름 없는 배첩장들의 손끝 덕분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형문화재를 박물관 속 전시품으로만 소비하고 있지 않은가요?

    배첩장의 기술이 단순한 전통 기술이 아닌, 기록을 지키고 문화의 생명력을 이어가는 필수 예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조선의 기록 문화가 지닌 깊이를 되새기고 보이지 않는 장인의 숨결을 세상에 다시 드러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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